튀르키예 세속화는 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나

튀르키예를 여행하거나 오래 머무는 사람은 종종 이질감을 마주한다. 이스탄불의 일부 거리에서는 술집이 밤새 문을 열고 옷차림이 세련된 사람들이 오가지만, 차로 몇 시간 떨어진 도시에서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삶이 흘러간다. 세속화가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은 적이 없고, 국가기구가 떠받치는 껍질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혁의 대상은 국가기구, 사회는 아니었다

케말 혁명은 칼리파를 폐지하고 신학교를 닫았으며 수피 교단의 도장을 봉인하고 문자와 복장을 바꿨다. 조치 자체는 급진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명령은 주로 국가기구와 도시 엘리트에게 작용했고, 아나톨리아의 넓은 농촌과 소도시는 실제로 개조되지 않았다.

신학교가 문을 닫자 종교 교육은 다른 곳에서 이어졌고, 도장이 봉인되자 수피 교단은 지하로 들어갔다. 내륙 주민에게 국가는 깃발만 바뀌었을 뿐 일상은 예전 규칙대로였다. 세속화는 사회가 스스로 자라낸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온 제도였다. 다수의 능동적 동의가 없었기에 강제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보호, 보호할수록 정당성 상실

세속화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군부의 후견이 필요했다. 군부는 세속 공화국 수호를 헌법과 국가안전보장회의 제도에 새겼고 여러 차례 직접 개입했다. 1960년 쿠데타, 1971년 각서, 1980년 쿠데타, 1997년 총리 축출, 2007년 전자 각서가 그것이다.

1997년 이후 대학에서 머릿수건을 쓴 여학생들이 교문 밖에서 막힌 것은 이 후견 논리의 일상적 얼굴이었다. 문제는 개입할 때마다 세속화가 민심에 뿌리를 두지 못했음이 공개적으로 드러났고, 일반 국민은 그것이 엘리트가 강요한 도구라고 더 확신하게 됐다는 점이다. 결국 후견인 스스로 정당성을 잃었다.

억눌린 사회적 기반은 자라났다

반대편에서 수십 년간 억눌린 사회적 기반은 멈추지 않았다. 인구가 늘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됐으며 종교 학교가 계속 생겨났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신앙심이 깊으면서 장사에도 능한 신흥 부유층 상인들이 등장했다. 코니아, 가지안테프, 카이세리 상인 집단은 종교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자본과 조직을 갖췄다.

현지인들은 반세기 넘게 평행하게 살아온 두 집단을 ’검은 튀르키예’와 ’하얀 튀르키예’로 구분하며 서로를 얕본다. 2002년 에르도안 집권을 많은 이가 문제의 시작으로 보지만, 실은 결과에 가깝다. 한 번도 개조되지 않은 사회적 기반이 마침내 투표로 말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종교 학교가 길러낸 신세대가 대학과 공무원 조직, 상업계로 진출했고 표가 늘면서 엘리트 주도의 세속화는 버티지 못했다.

더 깊은 층위의 어긋남

케말의 세속화는 프랑스 모델을 참조했고, 핵심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아니라 국가의 종교 통제였다. 종교는 공적 생활에서 배제된 적이 없고 관리자만 바뀌었을 뿐이다. 국가를 통제하는 세력이 바뀌면 종교 자원은 자연히 다시 동원된다.

여행자와 거주자에게 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세속이냐 보수냐’라는 꼬리표를 외우는 것보다 유용하다. 눈에 보이는 두 개의 튀르키예는 누가 옳고 그른 도덕극이 아니라, 한 국가 안에서 두 사회적 기반이 오래 병존해온 결과다. 진짜 질문은 세속화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국가 사업에서 다수가 함께하려는 공동의 것으로 바뀔 수 있느냐일 것이다.

0

0 条评论

支持 Markdown · 回复会实时推送给对方

还没有评论,写下第一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