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지진 100년, 중국의 원조와 잊힌 비극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역에서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해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중국 북양정부는 즉시 20만 위안을 구호금으로 배정하고 해군 함정을 파견해 물자를 수송했다. 전 국무총리 돤치루이는 톈진에서 ’구재동지회’를 조직해 10만 위안을 먼저 기부했다. 불완전한 집계지만 중국 관민이 기부한 금액과 물자는 수백만 위안 상당에 달했다.
100년 전의 이 원조는 오늘날 중국어권 인터넷에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지후(知乎) 작가 ’차후컨스제(茶狐看世界)’는 글에서 이 역사를 돌아보며, 중국인의 선의가 정당한 보답을 받지 못했고 간토 대지진이 오히려 일본이 ‘악마로 돌변한’ 전환점이 됐다고 지적했다.
100년을 건너온 유산
요코하마의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지금도 중국에서 온 두 가지 유산이 남아 있다. 한 쌍의 석사자와 ’유명종(幽冥鐘)’이다. 석사자는 공원의 주 건물인 ‘위령당’ 입구에 있으며, 받침대에는 ’왕인태(王陰泰)가 삼가 바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00년의 풍파를 겪었지만 글자는 아직 희미하게 읽을 수 있다. 유명종은 저명한 화가 왕이팅(王一亭)이 적극적으로 기획해 주조한 것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평화를 기원하고 지진 희생자를 위령하는 데 쓰였다.
20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왕이팅 가문의 후손들이 세계 각지에서 요코아미초 공원에 모여 한중일 친구들과 함께 ’평화우호의 종’을 울렸다. 이 장면은 한중 민간 우호의 미담으로 남았다.
재난에서 학살로
그러나 지진 이후 일본은 평화로 나아가지 않았다. 도쿄의 질서가 극도로 혼란한 가운데 ’조선인이 방화하고 독을 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사회에 퍼졌다. 극우 군경과 민간 ’자경단’의 선동 아래 수천 명의 무고한 조선인(그리고 일부 중국인 노동자)이 잔혹한 수색과 학살을 당했다. 공원 한쪽에는 지금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비석 하나가 서 있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다. 이 비석은 그 유혈의 역사를 조용히 기록하고 있다.
이 자연재해는 결국 약자이자 이민족을 향한 학살로 변질됐고,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붕괴한 축소판이 됐다. 지진 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겼지만 막대한 재정 부담을 안고 있었고 사회 갈등이 날카로웠다. 지진 후 군국주의 세력은 빠르게 고개를 들었고 결국 일본을 침략전쟁의 길로 밀어넣었다.
왜곡된 기억과 반성
1945년 미군은 도쿄에 대규모 소이탄 폭격, 이른바 ’리메이 화공’을 감행해 수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일본民众은 공습의 고통을 깊이 기억하지만, 자신이 당한 고통만 기억하고 전쟁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의도적으로 흐린다면 그 역사 기억은 왜곡되고 불완전한 것이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비, 도쿄 대공습.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근대 일본의 매우 아이러니한 역사적 고리가 완성된다. 재난 앞에서 보인 중국인의 관대한 원조와 이후 일본이 이웃 나라에 저지른 만행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선의는 물론 소중하지만, 역사의 교훈은 더욱 기억할 가치가 있다. 재난에 대한 반성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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